예술영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덕분에 그나마 나아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면 어쩐지 어렵거나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이 든다. 이런 점에서 202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추락의 해부’는 이해하기 쉽다고 하기 힘들겠으나 확실히 재밌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며 프랑스 영화계에 꺼져가던 예술 영화의 불을 지폈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간략한 영화 소개
영화는 프랑스 그로노블 인근의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유명 작가 ‘산드라’는 남편 '사뮈엘' 추락사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하필 남편의 추락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시각 장애가 있는 아들과 아들의 안내견이었고, 결국 산드라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화의 장르는 법정, 드라마, 스릴러로 분류되는데 영화 안에서 가장 많은 장면이 진행된 곳이 법정이라는 점, 이야기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는 데서 장르의 분류에 이견은 없으나 뭔가 그 이상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단단하게 얽고 끌고 가는 연출 덕에 152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 내용은 영화 소개 외의 내용과 본 영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이 일부 담겨 있어 영화 관람 전이라면 유의 요망)
‘형식이 핵심’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언택트톡에서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는 1950년대 영화 '살인의 해부'를, 추락해 가는 부부의 관계에 관해서는 1970년대 영화 '결혼의 풍경'을 언급한다. 또한 이 영화 전반에서 다루는 주제인 믿음과 이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종교학자 안셀무스의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sed credo ut intelligam)'를 인용한다.
관객은 법정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영화의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범인이 누구일까를 집중하면서 보게 되는데 특히 검사와 산드라의 변호사, 뱅상이 치열하게 공방하고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가운데 이를 정신없이 따라가면서 무엇이 사실인가를 쫓게 된다. 그러다 재판 심리 과정 중 알게 된 부모의 현실로 인해 산드라의 아들 다니엘의 고뇌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어쩌면 산드라의 무죄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결국 ’ 믿는다 ‘는 것도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
감독은 산드라의 무죄와 유죄를 오락가락하며 어떤 것이 사실이고 누가 진짜를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결코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영리한 연출을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의 형식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라고 말하는데 80분간의 언택트톡 중 가장 깊게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사무엘이 어떻게(혹은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은 여전히 모호하나 역설적으로 결국 관객에게 당신은 어느 쪽을 믿기로 결정했냐는 감독의 질문이 명확하게 보이게끔 연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외에도 영화에 산재한 장치와 설정 - 이를테면 잘 나가는 작가가 아내인 산드라이며, 집안일을 주로 도맡아 하던 남편 사뮈엘이 가사 분담에 대해 불만을 크게 품는다거나 산드라가 몇 번의 외도를 했고 심지어 양성애자라던가 하는 - 들은 무척 매혹적이어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이나 곱씹게 한다.
아들에게 구원 받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일치하여야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며 진실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 둘 중 하나가 공백일 경우 나의 판단은 결국 믿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어 한쪽을 왜곡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영화는 어쩌면 '구원'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시각 장애인 다니엘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다니엘의 진술은 청각에 의존한 것이기에 완전하지 못하다. 다니엘 역시 부모님의 대화를 들은 것이 전부이므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를 ’ 믿기로 결정‘한 다니엘은 법정에서 산드라에게 유리한 진술을 한다.
다니엘의 진술은 (작가로서의 재능도 없고, 아내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하던) 아버지 사뮈엘이 (처음) 자살을 시도한 이후 아들 다니엘과 나눈 대화였는데, 아버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위해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는 안내견 ‘스눕’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느냐, 하지만 언젠가 스눕도 떠날 수 있으니 각오해 두라, 그때는 무척 힘들고 슬프겠지만 살아갈 수는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스눕을 두고 한 말이 아니며 생각해 보니 아버지 사뮈엘 자신에 대한 얘기였음을 이제야 알겠다는 것.
어쩌면 다니엘이 말한 사뮈엘과의 대화는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니엘은 이 진술을 통해 자신의 사고로 그동안 고통받았던 아버지의 죄책감과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족을 떠나버린 아버지를 이해하고, 살아있는 동안 아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 아버지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것 같았다.
또한 법원에서 내린 무죄 선고는 산드라를 사회적 죄인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심리 과정을 통해 아들 앞에서 자신의 외도와 망쳐버린 부부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이상 산드라는 아들 앞에 선 죄인이었다. 그렇기에 집에 돌아오기 겁이 났다는 산드라의 고백, 혹은 고해에 아들 다니엘은 산드라를 깊이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엄마를 용서하고 구원한다.
믿음으로부터 구원받고 용서받는 것은 반드시 종교만의 영역은 아닐지도.
신선도: Fresh(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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